Page 127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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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러 분과학문도 함께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불교와 근대학문
             분야를 망라한 시험 과목을 예로 들었다. 덧붙여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외
             국 유학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불교 포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포교당의 경제적 자립이 중요함을 강조

             하고, 지식과 체육의 양성을 도모하고 신도의 조직과 활동을 장려해야 한
             다고 제안했다. 또 사업의 경영과 산림 활용을 통해 사원경제를 운영하고
             사회구제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비구니는 수계 조건을 비구

             와 똑같이 하고 의무교육을 통해 불교 교리를 배우는 한편 간호, 유아교

             육, 문학 등 여성에 맞으면서 사찰에 필요한 특화된 전문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백성욱은 그 유명세에 비해 학문적 성과나 생애와 관련된 공개 자료가

             의외로 적다. 전통적 교육을 받았고 최초의 유럽 유학파 세대임에도 식민

             지라는 현실의 제약과 해방 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 전쟁 등으로 인해 학
             술 연구에 올곧게 몰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20대에 근대불교학
             의 본고장인 유럽에 가서 성과를 체득하고 연구방법론을 익힌 그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면 해방 후 한국 불교학의 수준과 위상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시대의 굴곡과 한계를 극복하고 동·서양과 신·구의 세대를 과감
             히 뛰어넘는 역할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이유이다.









             ※  편집자: 『고경』 제100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8 | 에도 도시오’편(p.165)에 실렸던 사진
               설명, 즉 “사진 1. 『조선선교사』, 春秋社, 1930.”은 “사진 1. 『조선불교사의 연구』, 東京: 國書
               刊行會, 1977.”의 오기誤記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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