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P. 91
어린 시절 산수 공부를 할 때처럼 책 뒤쪽으로 가서 답을 미리 알고 공
부하는 식으로 이 시를 읽어봤자 거죽만 훑을 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알았다’라는 감각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범부도 해설을 들으면 ‘훈풍자남래 전각미생량’의 경지를 잠깐 동안 맛
볼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힘은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옆에서 누가 어깨를 툭 건드리기만 해도 마법은 끝나버리고 우리는 다시
평범한 범부로 돌아옵니다.
궁궐을 짓는 목수들 세계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집니다.
“참새와 목수는 처마에서 운다.” 4)
이 경지도 순수한 인식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또 하나의 별세계를 보여
줍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오직 처마만 있고 참새나 목수는 사라지고 없는
경계입니다.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처마 밑의 골조를 숨기지 않고 다 드
러내는 서까래의 디테일만 순수하게 남고 나머지는 다 사라진 세계입니다.
이런 미적 관조의 시선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문득 이런 처마 밑에서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되어 사라지거나 한 마리의 참새가 되어 조그만 소
리로 한번 울어보고 싶습니다.
4) 마츠우라 쇼우지, 『천년을 이어온 궁궐목수의 삶과 지혜』(2003).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