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0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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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의 업설
빨리어 깜마(kamma)는 어근 kṛ(to do)에서 파생된 명사로 ‘행위, 행함’을
뜻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행위를 업業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의
도적 행위’만을 업이라고 한다. 붓다는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
는 것은 의도意圖(cetanā)이다. 의도를 가지면 몸과 입과 뜻으로 행동하게
된다.”(AN Ⅲ, 415)고 했다. 따라서 의도가 없으면 어떠한 업도 지을 수 없
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업설이 인간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쭐라깜마
위방가-숫따(Cūḷakammavibhaṅga-sutta, 小業分別經)」(MN135)에 의하면, 수
바(Subha)라는 바라문 학도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원인과 어떤 조건 때문에 [같은] 인간으로서 천박한 사람들도 있고 고
귀한 사람들도 있습니까?” “바라문 학도여, 중생들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
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업이 중생들을 구분 지어서 천박하고 고귀하게 만든
다.”(MN Ⅲ, 202-203)고 했다. 요컨대 ‘인간 불평등의 원인’이 업業 때문이라
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경전에서도 인간의 차별은 과거에 지은 공덕(merit)
때문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과거의 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태어난 이후의 업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개선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다른 종교·철학에서 말하는 업과 다른 점이
다. 아리아(Ārya)인들은 자신들의 종족이나 신분의 우수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업설을 이용했다. 하지만 붓다는 개인의 인격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업설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착한 행위를 하면 좋은 과보[善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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