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0 - 고경 - 2022년 1월호 Vol.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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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에는 전국의 각 사찰에서 설립한 일반 학교의 교사나 강원의 강사
          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통 강원과 신식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친 안진호는 이후 20여 년 동안

          문경 김룡사와 대승사, 의성 고운사, 양주 봉선사, 장성 백양사, 오대산 상

          원사 등에서 강의를 맡았다. 그는 김룡사에서 출가하고 대승사에서 강석
          을 열었던 권상로와 더불어 경상북도 지역의 이름난 강사였고, 두 사람은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1914년에는 예천 용문사와 명봉사가 공동으로 포

          교당을 건립했는데, 정식 명칭은 ‘대본산 김룡사 말사 용문사 명봉사 예천

          포교소’였다. 안진호는 1915년에 이 포교당에 예천불교회를 조직하고 학생
          들을 위한 야학회를 운영했고 1921년까지 포교사로 활동했다.



            소금장수와 등유장수 등 기행



           그는 짧게나마 기이한 행적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30세 무렵에는 생명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소금 같은 이가 되겠다며 소

          금장수로 나섰다고 한다. 또 40세가 넘어서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살겠

          다며 등유장수를 했다고 하는데, 이 무렵인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의 행적
          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925년 서울로 와서 정동의 중앙포교소에 머
          물렀는데, 이곳은 전에 원종 종정을 역임했던 이회광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때 안진호는 재조선 일본인들이 만들고 조선인 유력자들이 참여한 단

          체인 조선불교단의 1차 일본불교 견학 사업의 일환으로 시찰단에 참가했
          다. 8월 20일에 서울을 출발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오사카로 갔다. 시찰단은 9월 2일까지 오사카·교토·나라 일대를 다니면

          서 유명 사찰들을 답사했고, 그 밖에도 일본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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