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고경 - 2022년 1월호 Vol.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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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책[古書]을 조사하다 보면 첫 장에 찍힌 장서인藏書印을 자주 마주한
다. ‘책의 주인이 누구였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고 찾다 보면 그와 관련된
책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견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곤 한다. 어느
학자는 ‘책이 책을 불렀다’는 표현을 쓴다. 나는 ‘책이 인연들을 불렀다’고
생각한다. 한 줄기를 잡아당기면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 올라오듯이. 성철
스님의 백련암 책들이 그랬다.
책이 인연을 부르다
사실 성철스님이 생전에 소장했던 옛 책들은 공개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성철스님은 종교를 불문하고 우리 시대 우리 모두의 어른
이자 깨달음의 스승이 아니신가. 스님이 읽은 책들이 스님의 사상과 깨달
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장경각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선지식을 찾고
자하는 이들에게는 행운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궁궐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수행결사에 참
여하며 중국에 가서 많은 불서를 구해와 출판까지 주도했던 혜월거사 유
성종(1821~1884). 그가 스님의 책 속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성종 사후에 그
의 사촌동생인 이재 유경종(1858?~?) 거사와 호은 김병룡(1895~1956) 거사
의 만남 그리고 김병룡 거사와 성철스님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책
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들이 추적 가능했던 것은 성철스님의 책 속 장서인과 책을
기록한 도서목록, 책 곳곳에 남겨 둔 그분들의 메모 덕분이었다. 더 놀라
운 사실은 100여 년 이상 몇 사람을 거쳐 소장되었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찢김이나 충식이 적고 보존된 상태가 너무나 양호했다. 책을 소중히 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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