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22년 1월호 Vol.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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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생긴 것이다. 그 뒤 혼해스님은 쌀 30가마니 돈을 주어 감옥살이하는
             남편을 구하게 하여 석방이 되자 그이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5·16
             정변이나 사상범 재검거령으로 남편이 다시 감옥에 끌려가자 그 여인은 다

             시 함양으로 와서 살았다. 그렇게 혼해스님은 기구한 인연의 여인과 아들

             을 끝까지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젊은 학인 고우스님의 눈에는 그것이 이
             해가 되지 않았다.



                『화엄경』을 배우려 명봉사로 가다



               1966년에 혼해스님은 유일한 상좌였던 해인사 송월淞月스님이 예천 명
             봉사 주지가 되자 명봉사로 가셨다. 혼해스님께 강원 사교과 공부를 마친

             고우스님은 대교과 『화엄경』 공부를 하려고 혼해스님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절 살림도 어려웠지만, 경전 구하기는 더 어려웠다.
             특히 『화엄경』은 60권, 80권이니 더 귀했다. 혼해스님은 경을 구해 놓으라
             하시고는 출타를 하셨다. 고우스님은 경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

             을 하니 대승사에 『화엄경』이 있어 대승사로 가서 경을 가져와 한 달이나

             기다렸는데도 혼해스님이 오지 않았다.
               그때 고우스님은 『금강경』을 공부한 뒤라 참선을 해보고 싶은 발심發心이
             나서 선원으로 갈까 계속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참선하고 싶은 마

             음으로 명봉사를 떠나 향곡스님이 계시는 기장 묘관음사 선방으로 갔다.

               그 뒤에 혼해스님이 범어사 강사로 가시어 선원에 있는 고우스님한테 범
             어사로 오라고 편지가 왔지만, 이미 참선에 발심해서 공부하고 있었으니
             다시 강원으로 가지 않고 평생 선의 길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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