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8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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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끌어 올 수 있다.”고 하였다. 대중들은 이때부터 그를 고래를 이끌어
되돌아올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철경掣鯨’으로 법호를 불렀다.
한편 호의시오는 출가 이후 연담유일의 문하에서 사집四集을 수학하고
완호에게서 『능엄경』을 배웠다. 이후 여러 스승으로부터 불교경전뿐만 아
니라 유가儒家의 장구章句나 역사서와 고문을 배웠다. 1807년 겨울에는 역
시 『대둔사지』 편찬에 참여했던 수룡색성과 함께 『화엄경』을 공부하기도
했다.
호의는 완호의 법을 계승한 후에는 경주 기림사에서 천불千佛을 조성하
여 대둔사에 봉안하는 큰 불사를 수행했다. 그리고 1858년에는 초의와 함
께 스승 완호의 비석을 건립하여 그 법풍法風을 널리 폈고, 유덕遺德을 기
렸다. 스승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 문중에서도 효도하는 제자가 끊이
지 않았다고 한다. 정약용 또한 호의와 그 교분이 두터워 호의의 법호法
號에 대한 게송과 그 서문을 지어 주었다. 아마도 호의가 초의와 같은 완호
의 문중이었고, 초의와 다산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면 호의 역시 다산
에게서 많은 학문을 수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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