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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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으로 1939년 팔공산 운부암 선원에서 처음 만나 함께 정진한 이래 1978
년에 향곡스님이 먼저 입적할 때까지 평생 각별하게 지낸 도반이다.
향곡스님이 봉암사에 가니 성철, 청담, 자운, 월산, 보문스님 같은 당대
의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함께 공주규약을 정해서 참다운 정진을 하고 있
었다. 광복 직후인 1947년 봉암사 결사는 비록 소수의 선승들이 시작했지
만, 그 영향력은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룰 만큼 큰 것이
었다. 당시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유산으로 처자식을 거느린 결혼한
승려인 대처승들이 교단과 사찰 운영을 주도하며 참선 수행과 전법보다는
가족 부양과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여 참선하는 선승들은 뒷방으로 밀려
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성철, 청담, 자운, 보문스님 같은 분들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로 참선 수행으로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봉암사
에서 결사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향곡스님은 이미 스승으로부터 인가까지 받았지만, 봉암사에서 도반들
이 좋은 뜻으로 함께 모여 정진하자는 부름을 받자 함께 동참한 것이다. 봉
암사에서 치열하게 정진하던 어느 날 성철스님이 향곡스님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이 있
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향곡스님은 이 말에 꽉 막혀 삼칠일 동안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고 앉
으나 서나 자나 깨나 한결같이 참구하던 중 문 앞을 지나다 당신의 양손을
보고는 홀연히 확철대오하고 오도송을 읊었다. 이로부터 천하 조사들의 말
에 막힘이 없었고, 인연 따라 자유롭게 노닐게 되었다. 이에 당시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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