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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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 조계종 종찰로 오로지 승려들만의 수
                                     행 공간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사찰이다.
                                       창건 당시 도헌국사는 희양산 중턱의 봉

                                     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수행승들이 수행하는 공간이었
                                     으리라 짐작된다. 용암봉곡이라는 말은 바
                                     위산이 봉황을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

                                     고, 높은 바위산에서 아래로 길게 뻗은 계

                                     곡으로 물이 흘러 물을 상징하는 용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계곡에 물이 떨어져 이
                                     루는 소沼를 용추龍湫라고 하는 것도 용이

                                     물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황이든

                                     용이든 실재하지 않고 인간의 상상 속에서
          사진 3. 봉암사 일주문.
                                     만들어진 것이니 더 얘기할 것이 없다.
           시호가 지증智證이기에 지증대사로도 불리는 도헌국사가 봉암사를 창건

          한 이후에 후삼국간의 대립으로 인한 전쟁 속에서 사찰은 폐허화되고 극

          락전極樂殿만 남아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다 고려 태조太祖(918~943)
          18년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878~956)화상이 중창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여 고려불교의 중흥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그 유명한 함허기화涵虛己和(1376~1433)화상, 즉 득

          통得通대사는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하고 1431년 세종
          13년에 그간 퇴락한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며 강론을 하다가 입적
          하였다. 이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가 나온 후에 우리나라에서

          는 『금강경』이 본격적으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유불선儒佛仙의 삼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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