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2년 3월호 Vol.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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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의식하자마자 우리는 다시 근심 걱정으로 어
두워집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홀로 자연과 대면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
니다. 주변 경치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홀로 있으면 사람들 모습이 쓸쓸하
고 음울하며, 서먹서먹하고 적의를 품은 듯이 보입니다. 4)
낙동강 7백리 갈대밭
우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짐짓 웃으며 신라시대 토성 유적지를 향해 건
너편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이 언덕도 98m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정상
다운 경치를 보여줍니다. 이런 완만한 언덕을 설렁설렁 올라가는 일, 그것
또한 행복한 일입니다. 신라 토성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절벽을 끼
고 내려갑니다. 【사진 4】
발목이 푹 빠지도록 낙엽이 쌓여서 하마터면 발목을 삘 뻔하지만, 주변
에 친구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경험의 질은 높아지고 정신은 명랑해집니
다. 이제야 꽃 피우는 야생화도 있군요. 관호산성과 신라 토성 곳곳에 낙
엽 사이로 까마중 하얀 꽃이 별처럼 빛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름
답고, 꽃을 피우는 일은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강변으로 나오니 낙동강 700리에서 손꼽히는 갈대밭 군락지가 펼쳐집
니다. 갈대밭을 끼고 오토캠핑장이 있어서 오토캠핑 중인 사람도 적지 않
습니다. 갈대밭 사잇길을 걸으면서 마치 세밀한 동판화 사이로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강물이 우리들의 눈과 귀에 찰랑이며 부딪칩니다. 생각으로 골치 아파
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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