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고경 - 2022년 4월호 Vol.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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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암스님은 따로 법문을 하지 않고 농사짓고, 밥
          하고, 바느질하면서 하는 공부를 가르치셨다. 한마디로 이신작칙以身作
          則하였다. 생활에서 공부하는 법을 말이 아니라 몸소 행으로 보여주신 것

          이다.

           고우스님은 늘 서암스님이 행하신 생활에서 공부하는 가풍이 사라져 버
          렸다고 이것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암스님은 밥하고 반찬 만
          드는 일을 그렇게 잘 하셨다고 한다. 그땐 불을 때서 밥을 지을 때이니 밥

          을 잘못하면 먹지 못했다. 고우스님이 밥을 잘 못하니 당신이 밥 짓는 전

          문가라며 손수 밥을 하셨다. 아마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혼자 자취생활
          을 많이 하셔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또 평소 농담도 잘 하시어 늘 재미
          있고 유쾌했다. 서암스님은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나 나는 고우스님께 하

          대하지 않았다. 고우스님은 그런 서암스님의 모든 것이 좋았고 인간적으

          로 가깝게 느껴지며 은사처럼 따르게 되었다.
           금선대에서 서암스님을 만난 이래 고우스님은 안거 때에는 묘관음사 선
          방에서 결제 정진하고 산철이 되면 금선대로 와서 서암스님을 모시고 정

          진하였다. 어디를 가도 같이 따라 가고 그렇게 서로 많이 의지하며 살았다

          고 노년에 회고하셨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은 고우스님이 서암스님 상좌
          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고우스님께서는 스승과 상좌 이상의 관계였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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