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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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적 차원의 견성과 실질적 차원의 견성


               그럼에도 성철스님은 선정의 성취나 경계의 체험이나 지견의 열림에 도

             무지 고개를 끄덕여 줄 생각이 없다. 자나깨나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

             를 통과한 것이 아닌 이상, 그리하여 제8아뢰야식의 미세망념이 완전히 사
             라진 구경무심이 아닌 이상, 그 어떤 것도 결국 유심의 영역에 수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국 선방에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도리어 드문 것이 현재 한국
                  불교의 실정이고, 이 자리에 앉은 선방 수좌들 역시 나름대로 견성
                  에 대한 견해를 한 가지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흔히 참선하

                  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그것을 두고 ‘견성했다’거나 ‘한 소식

                  했다’고들 하는데, 정작 만나서 살펴보면 견성하지 못한 사람과 똑
                  같다. 과연 무엇을 깨쳤나 점검해 보면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
                  각나는 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선문정로』는 특별한 경계 체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수정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극단적 발언도 사양하지 않는다. 예컨대 “종문의
             정안종사치고 10지보살이 견성했다고 말한 사람은 한 분도 없다.”는 식

             의 문장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이에 대한 반박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

             하다. 특히 견성이 본격 수행의 시작점인가 아니면 수행의 최종 도달
             점인가 하는 데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성철스님은
             이해적 차원의 견성과 실질적 차원의 견성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강

             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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