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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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에 있어서도 ‘해오점수’에서 말하는 견성과 ‘증오돈수’에서 말
              하는 견성에는 차이가 있다. 해오의 견성은 10신초十信初이고 증오
              의 견성은 10지를 넘어선 최후의 묘각을 일컫는다.”




           이해적 눈뜸을 중시하는가 실질적 깨달음만을 인정하는가에 따라 견성
          에 대한 의미 규정이 다르다는 말이다. 물론 성철스님은 실질적 깨달음만
          을 인정한다. 최종의 미세한 망념이 구름 걷히듯 완전히 사라지고 진여가

          백일처럼 드러나 다시 어두워지는 일이 없어야 견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선문의 정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수행의 시
          작점이나 중간지점에 일어나는 어떤 체험을 견성으로 보는 관점을 철저히
          배격한다. 왜 그런가?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심각한 병폐이다.
              『선문정로』를 편찬하면서 첫머리에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힌 까닭

              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견성은 수행의 끝에 일어나는 최종적 사건이다. 이 밖의 단계에 견성이
          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 수행과 결과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

          다. 이를 위해 성철스님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우리를 설득해 나간다. 그럼에도 최초의 눈뜸, 혹은 중간 단계의 체험을 견
          성으로 보는 주장 역시 근거가 부족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앞에 두고 옳
          고 그름을 다투는 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영원한 도돌이표를 그리게 될

          수밖에 없다. 상대적 두 견해의 어느 한쪽에 서는 순간 중도의 상실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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