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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듭하며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다. 나
라가 망하면 자신들도 없어질 것인
데 이런 것을 모르니 왕권을 놓고 사
투를 벌인 것이다. 이런 장면은 비단
신라만이 아니라 동서양 역사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인
간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이 마찬가
지라는 점이다.
신라 42대 왕인 흥덕왕이 후사가
사진 1. 해상왕 장보고 영정.
없이 죽자 그의 사촌 동생인 김균
정金均貞과 다른 사촌 동생 김헌정金憲貞의 아들인 김제륭(김균정의 조카)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이 때 시중侍中인 김명金明과 아찬阿飡인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김제륭을 옹위하고, 아찬 김우징과 그의 조
카 김예징金禮徵,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 김양金陽은 김균정을 옹위하면서
서로 세력을 형성하여 대대적으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시기의 왕위쟁탈전
은 「김제륭(희강왕)-김명(민애왕)」의 김제륭파와 「김균정-김우징(신무왕) 부
자」의 김우징파 사이의 투쟁이었다. 이를 더 올라가면, 원성왕의 아들 중
인겸계仁謙系와 예영계禮英系의 다툼이 이어져 오는 것이고, 좁게는 김인겸
의 아들인 김충공金忠恭(민애왕의 아버지), 김헌정, 김균정 가계 사이의 분쟁
이었다.
이 권력투쟁에서 김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에 맞아 김우징 등과 함
께 청해진淸海鎭의 궁복弓福 즉 장보고張保皐(?~846)에게로 도주하여 그에
게 의탁하는 것으로 일단의 결말이 났다. 그때까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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