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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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였다.  이때  청해진에서
             는 김양, 염장閻長(閻丈, 閻文

             ?~?), 장변張弁(?~?), 정년鄭
             年(?~?), 낙금駱金(?~?), 장건

             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 등 장수들이 김우징을
             옹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는 장보고는 섬 출신으로 미

             천한 신분이라 왕이 될 수 없
             다고 생각되었기에 왕위쟁탈
             전에서 내세울 인물은 김우

             징뿐이었다.  나중에  장보고

             가 이 한심한 난장판에 자기
             도 왕권을 쥘 수 있다고 생각
             하여 자기 딸을 문성왕의 왕
                                          사진 2.  신라말의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고원 최치원崔致遠
             비로  밀어넣으려고  하는데,                 영정.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그도 자기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난을 일으켰다.
             종당에는 염장에게 잡혀 죽어 황천길로 갔지만 이런 장면은 아직은 나중
             에 발생하는 일이다.

               아무튼 김우징의 세력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왕경을 향하여 쳐들어왔는

             데, 838년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출병시킨 무주武州 철야현鐵冶
             縣(지금의 나주 부근)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음 해 1월에 달벌達伐(지금의 대구)
             전투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월유댁月遊宅으로 급하게 도망을 갔으나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즉위 3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이 싸움으로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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