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4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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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섬 출신의 사람, 장보고에게 진골세력들이 달려가 그에게 의탁한 것이
그의 군사력 때문이었으니, 이미 왕실의 기반이나 사회의 기반은 균열이
심하게 간 상황이었다. 이 왕위쟁탈전에서 김균정-김우징 세력이 타도된
이후 김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실질적인 정치의 주도권은 김명
과 이홍에게 있었다. 그래서 희강왕에게 불만을 가진 김명은 이홍과 합세
하여 다시 난을 일으키고 왕의 측근들을 죽이니 연약한 희강왕은 궁중에
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김충공의 아들 김명이 21살에 왕좌를 차지하
였으니 그가 민애왕이다.
왕위를 둘러싼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애왕이 즉위하자마자
바로 김균정계 세력이 힘을 모아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였다. 청해진으
로 도주한 김우징 등이 그간 왕실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드디어
이때다 하고는 나섰다. 838년에 그들은 장보고의 군사 5,000명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해 왕경으로 진격해 왔다. 장보고는 흥덕왕 3년 즉
828년에 해적海賊을 토벌하고자 한다는 청원을 하여 왕의 승낙을 받아내
어 지금의 완도莞島인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였고, 해상 활동으로 키운 경제
력과 함께 1만 명에 달하는 강력한 군사력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의 군사
단위인 진의 설치는 왕의 승낙은 받은 것이었지만, 그 군사들은 나라의 것
이 아니고 장보고 개인의 사병私兵이었다(사진 1). 장보고는 혜공왕惠恭王(재
위 765~780) 이후 중앙 왕실의 통제력이 약해진 신라의 국내 정황과 당나
라의 안녹산安祿山(703?~757)의 난 이후 당나라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서 서해를 무대로 하여 신라와 당 사이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장악하면서
그의 개인적 해상세력을 키워 온 인물이다.
나중에야 어찌되건 우선 왕좌부터 뺏어야 하는 김우징으로서는 장보고
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민애왕을 내쫓고 왕권을 차지하는 것이 최대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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