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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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이런 장면이 끼어들다니…… 나무관세음보살!
           그런데 이런 법난法亂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선종
          에 있어서는 사찰의 전각이나 전적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별로 없었다. 중국 전역의 선승들을 색출하여 잡아 죽이

          지 않는 한 불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시대에 선의 황금시대를
          열어간 임제의현臨濟義玄(?~867),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황벽희운黃蘗希

          雲(?~?), 위산영우潙山靈祐(771~853), 조주종심趙州從諗(778`~897), 덕산선감德
          山宣鑑(780~865),  앙산혜적仰山慧寂(814~890),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

          운거도응雲居道膺( 835?~902) 등 선풍을 드날린 선장禪匠들이 대거 배출되
          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며’  천하에 큰 바람을 일으키는 역사가 펼

          쳐졌다. 신라의 도의道義(?~?, 도당유학: 784~821), 혜철慧徹(785~861, 도당유
          학: 814~839), 현욱, 도윤道允(798~868, 도당유학: 825~847), 무염無染(800~888,

          도당유학: 821?~845) 화상 등이 당나라에서 선법을 배워와 선풍을 펼쳐간 시
          기가 이때였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문성왕은 불교진흥에 관심을 가졌는데,

          851년 당나라에 갔던 사신 아찬 원홍元弘이 불경佛經과 부처의 치아사리를

          가지고 왔을 때 왕은 교외에 나가 이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857년 문성왕
          은 숙부이자 신무왕의 이복동생인 의정誼靖(祐靖)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사망하였다. 김균정의 아들인 의정이 곧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이 되면서 균정계의 왕위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헌안왕도 병으로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상태에서 희강왕의
          손자이기도 한 맏사위 김응렴金膺廉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이 김응렴이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이다. 헌안왕대에 와서 균

          정계에서 후손이 끊어져 제륭계가 왕이 된 셈이다. 제륭계이든 균정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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