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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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때 귀국하여 신라를 살려보려고 진성여왕에게 국가개혁안을 올리
는 등 고군분투하던 때가 이 시절이다. 결국 그는 진성여왕이 효공왕孝恭
王(재위 897~912)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사태를 눈으로 보고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양위표讓位表」를 황제의 신하로 칭해야 하는 여왕을 대신하여 짓는
일을 당하고는 무너져 가는 신라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과 실의에 빠져 세
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천하에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시절을 만나지 못
하니 그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의 종적을 알 수 없어 후세 사람들은 그
가 신선神仙이 되었다고 했다(사진 2).
최치원 선생이 진성여왕을 대신하여 지은 장문의 「양위표」의 시작은 이
렇게 되어 있다.
“신모는 아룁니다. 신이 듣건대, ‘원하되 탐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공문의 제자들에게 전한 가르침이고, ‘덕은 사양하는 것보다 더 나
은 것이 없다’라는 말은 진晉나라 사신이 전한 잠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구차하게 자리를 빼앗아 편안을 누리게 되면 현인의 길을
막은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臣某言. 臣聞欲而不貪. 駕說於孔門弟子. 德
莫若讓. 騰規於晉國行人. 苟竊位自安. 則妨賢是責].”
그 마지막은 이렇다.
“신은 매번 저의 역량을 헤아려보며 행할 것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물러나기로 하였습니다. 아무 때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광
화狂花 같아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깎을 수 없고 새길 수도 없는 말
라빠진 나무[朽木]로나마 생을 마치고자 합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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