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고경 - 2022년 6월호 Vol.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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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묘관음사에서 여러 철을 함께 잘 정진하였다.
그 인연으로 해인사까지 고우스님을 데리러 온 것
이다. 형님처럼 따르는 선배 스님이 일부러 먼 길
을 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데 안 간다고 할 수 없었
다. 그렇게 따라나서서 결국 1967년 동안거는 성철
사진 1. 조계종 원로의원을 스님께서 방장으로 계시던 해인총림에서 하지 못
지내신 활안스님.
하고 묘관음사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동안거가 끝나고 해인사에서 안거를 난 법전法傳(1926~2014) 스님
이 묘관음사에 와서 성철스님께서 동안거 동안 백일법문을 하셨다는 것을 말
해 주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만약 그때 성철스님께서 백일법문을 설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고우스님께서는 해인총림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셨고, 직접 백일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하셨다.
1960년대 한국불교는 격동기였다. 일제강점기에 대처승들의 득세에 눌
려 뒷방에서 어렵게 참선 수도하던 비구 수좌들은 광복 후 1947년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와 1954년에 본격화된 승단 정화운동을 통해
서 천신만고 끝에 교단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리고 1962년 비구·대처 통
합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비구승 주도의 교단 운영권이 확립되어
갔다. 이런 배경에서 1967년에 해인총림이 지정되어 선풍禪風 진작의 기반
을 다졌고, 성철스님은 해인총림의 첫 동안거에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는
선종 가풍에서는 드물게 하루에 한 시간 씩 100일 가까이 설법을 하였다.
훗날 1993년경 고우스님께서는 원택스님이 책으로 만든 『백일법문』을
읽어보고는 너무나 기뻐하셨다. 당신이 그동안 공부한 경전과 참선 체험
이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훌륭하게 정리되어 있어 중도 정견이 확고해
졌다고 하셨다. 고우스님께서는 『백일법문』을 인류 최고의 불교입문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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