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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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들의 뜻이 좋으니 당신도 수용하겠다면서 다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지금 봉암사 산판은
             정부가 추진하는 산림 수종개량 10개년 계획의 1차

             5년 계약인데, 이 5년 계약은 그대로 유지하는 조

             건으로 수좌들이 추천하는 주지를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수좌들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사진 4.  선풍 진작을 위해 애
             하여 봉암사는 젊은 수좌들의 원력과 직지사 주지                        쓴 선림회 능혜스님.

             녹원스님의 결단으로 마침내 참선 도량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1969년 가을 봉암사에 들어가다



               김용사에 모여 봉암사에 대한 정화결사의 원력을 세웠던 10여 수좌들은

             드디어 1969년 가을 추석을 지나 봉암사에 들어갔다. 당시 봉암사에는 한 곳
             에 모여 좌선할 수 있는 선방도 없었다. 전쟁 직후인 1956년에 봉암사 결사
             참여자 중 막내격인 도우스님(도선사 청담스님 상좌)이 주지를 맡아 산판山坂을

             해서 60평짜리 큰방을 크게 지었는데, 다 지어갈 무렵 목수의 실수로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그 뒤 만성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큰법당을 짓다가 중단
             되어 봉암사는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정진할 만한 공간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10여 수좌들은 여러 전각에 흩어져 각자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양식도 문제였다. 그때 봉암사에 함께 들어간 무비스님은 이렇게 회고

             한 적이 있다.
               “대중이 많았으나 봉암사 살림은 어려웠다. 절 땅에서 나오는 옥수수,
             조, 콩 몇 말이 다였다. 그래서 양식이 떨어질 때면 돌아가면서 탁발을 나

             갔다. 또 어딜 갔다가 차비를 얻으면 그것을 혼자 쓰지 않고 공양비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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