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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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이 없었다. 봉암사에서는 원융살림을 한다고 했
지만, 원융살림을 할 것도 없었다. 워낙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때 무비스님은 호걸처럼 키가 크고 유쾌하여 봉암사에서 늘 재밌게 정
진했는데, 마음이 약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슬그머니 도망을 갔다고 한다.
고우스님 당신도 마음이 약했는데, 자기보다 무비스님이 덩치와 달리 더
약했다고 회고하셨다. 하지만 고우스님은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
보하지 않고 정면 대결했다며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걸 어른 스님들이 공심公心이라 하셨는데, 나는 그 공심에서는
양보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성질이 못됐다는 말도
들었지만 불교 공동체 일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어요. 봉암사
일이 특히 그랬습니다. 수좌계 전체를 위하는 일이고 조계선풍을
살리는 일이니 양보할 게 없었지요.”
봉암사 산판 일로 감옥에 간 고우스님
봉암사는 1947년 가을 성철스님과 자운스님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 법
대로 살자!”는 취지로 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949년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동안거를 마친 1950년 봄에 소개령이 내려 중단된 이후 당시까지
선원이 재건되지 못하고 도량만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전쟁이 나서 모두가 피난 갔을 때 만성스님은 홀로 남아 목숨을 걸고 봉
암사를 지켰다. 전쟁이 끝나고 종단이 승단정화로 혼란할 때 어떤 주지는
절 땅을 팔아먹거나 화전민들과 숯을 구워 절 운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봉암사의 교구 본사였던 직지사에서 주지를 새로 임명하면서 정부의 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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