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8 - 고경 - 2022년 11월호 Vol.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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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다솔사 전경.


          는 수행상의 흐름을 가리킨다. 최범술에게는 이러한 흐름을 계승하여 스
          스로 깨달은 상징적 존재가 원효였던 셈이다. 그는 원효가 무계행無戒行으
          로 반야의 지혜에 거리낌이 없어서 보현행원을 펼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서도 지계持戒가 사회화되어 회향되는 경지

          를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원효의 일심이며 유와 무의 극단을 버린 중도라
          고 설명한다.
           최범술의 호인 효당의 효曉는 원효元曉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만큼 원효

          에 대한 그의 존경심과 추숭의 염은 남다른 것이었다. 한편 그는 원효 외

          에 한용운에게서도 깊은 영감을 받았다. 한용운의 ‘님’의 의미를 『대승기신
          론』의 대승의 뜻으로 본 것도 그만의 독특한 해석이었다. 여기서 대승은 진
          여로서 ‘대사회성’이며 먼 궁극의 진리가 아닌 ‘그 사람으로서의 자각’을 의

          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사회적이기에 대승이며 사회성

          은 부처와 중생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원효 교학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 그는 주석서를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
          력을 기울였다. 본격적인 첫 성과는 「원효성사 반야심경 복원소」로서 연세

          대 국학연구원에서 펴낸 『동방학지』 12(1971)에 실렸다. 이 시기에 최범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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