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7 - 고경 - 2023년 2월호 Vol.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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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었다. 당시 태고종조론 외에 보조종조론이
             나왔고 또 9세기 초에 남종선을 처음 전래한 도의, 지눌이 속한 사굴산문
             의 개조인 범일도 종조로 거론되었다. 이재열은 태고법통의 사실관계를

             일일이 논증하며 그 오류를 밝히려 했고, 조계종사 서술과 보조종조론의

             관철에 일이관지했다. 그는 많은 사료들을 활용해서 비판적 논점의 글을
             썼지만, 대학 등 학계에 적을 두지 않아서인지 정식 학술지보다는 대중잡
             지에 싣거나 자비로 책을 출판했다.

               1941년 5월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체제가 출범했는데, 이는 조계종의 역

             사성과 태고법통의 정통성이 결합된 조합이었다. 이때 종조로 올려진 태
             고보우는 조선 후기 태고법통의 전통적 권위에 의거한 것이었다. 즉 중국
             임제종의 법통이 고려 말 태고보우에 의해 전수되어 청허휴정, 부휴선수

             등 조선시대로 이어져 왔다는 불교사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태고종조론

             은 권상로, 김영수 등 일제강점기 때의 대표적 불교학자들이 지지했다. 반
             면 송광사의 금명보정은 보조종조론을 주장했고, 이능화도 앞서 『조선불
             교통사』(1918)에서 “조계종은 보조지눌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니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지눌이다.”라고 한 바 있다. 한편 권상로와 방한암은 지눌이나

             태고보우 이전에 신라에 선종을 전래해온 도의를 초조로 앞세우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재열은 1942년 「조계종 원류 및 전등사의 근본적 연구」 등
             에서 도의는 조계종이 성립되기 400년 전이고 태고보우는 조계종이 만들

             어지고 나서 약 200년 뒤의 인물로서 원에서 임제종 승 석옥청공의 법을

             받아왔으므로 조계종의 종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조계종의 종조
             는 보조지눌뿐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그런데 종헌·종단을 무시
             하고 500년 동안 신봉해 온 태고 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회

             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결국 종단에서 그의 승려 자격을 박탈하고 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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