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고경 - 2023년 3월호 Vol.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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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에 이른다. 청암사는 본래 쌍계사에 속한 난야蘭若로 지어졌다고 한
             다. 영조 3년인 1730년에는 쌍계사를 옹주방翁主房에 속하게 하여 원당願
             堂으로 세수와 공납을 받게 하는 바람에  원성이 높아 조정에서 논란이 된

             적도 있었고, 정조 때에는 박학다식했던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의

             문집인 『서계집西溪集』의 목판을 쌍계사에 보관하고 추각追刻하기도 했다.
             1891년(고종 28)에 그의 후손인 박제억朴齊億 성주목사는 이 목판들을 청암
             사로 옮겨 정리하기도 했다.

               오늘날 수도산修道山이라고도 부르는 불영산에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 2년인 858년에 도선道詵(827~898) 화상이 쌍계사와 함께 수도사
             와 청암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화상의 이름만 등장하면 풍수風水니
             비보裨補니 하는 말만 풍성하기에 붓다의 진리를 찾아 얼마나 진지하게 구

             도자의 길을 걸어갔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다. 풍수나 보고 비기秘記니 도

             술道術이니 하는 등 이상한 행적을 남긴 승려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에 더하여 왕건王建(918~943)이 새 나라의 왕이 된다고 예언하였다고
             하여 고려 왕실에서는 후대로 내려오며 죽고 없는 사람에게 왕사王師와 국

             사國師의 칭호까지 부여하고 받들었으니 불교 승려가 권력자의 등극을 예

             언하고 맞추는 예언가가 되어야 주목을 받을 판이 되었다. 하기야 21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입학시험이나 선거가 있는 때이면 무술인, 점술가, 풍수
             가들의 말이 횡행하는 한국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신라가 말기로 오

             면서 권력투쟁으로  망국의 길에 접어들고 사회는 해체되어 가면서 백성들
             은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나라에 맡기기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살 길을
             찾아 나가야 할 형편이었기에 이런 괴이한 언설들이 등장했을 만도 하다.

               지방의 선종 사찰의 승려들도 어지러운 권력투쟁에서 각기 어느 한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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