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고경 - 2023년 3월호 Vol.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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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그 사람이 새 왕이 될 것이라며 지지하기도 했으니, 지식이 적고 세
상을 잘 알 수 없는 백성들로서는 참언과 술수에 휘둘리며 의존하는 경향
이 널리 확산되었으리라. 나라가 백성의 삶을 지켜주지 못하는 형편이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렇지만 불교의 수행승이 예언이니 비법이니 비기
니 도술이니 하면서 점이나 치고 풍수를 보면서 중생을 현혹시킨다면 붓
다의 가르침에서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암사가 창건되던 그 시절에는 당시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동리산문桐
裏山門을 연 혜철惠哲=慧徹(785~861) 국사가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고 한
다. 나중에는 도선국사가 이 혜철국사의 제자라는 말까지 만들어지지만
말이다. 그 시절 신무왕神武王의 이복동생인으로 왕이 된 헌안왕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여 통치기반을 굳건히 하려고 했기에 태종무열왕의 8대손
으로 보령 성주사聖住寺에 주석하고 있던 낭혜무염朗慧無染(801~888) 화상
을 존숭하여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기도 했다. 설악산 억성사億聖寺 염거廉
居(?~844) 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후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주석하고 있던
체징體澄(804~880) 선사가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는 일에도 적극 후원
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강한 불교적 통치이념이 지배하던 환경에서 쌍계
사, 청암사, 수도사 등이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신방화상이 수행했던 수도산
조선시대 대학자 장복추張福樞(1815~1900) 선생의 문집 『사미헌집四未軒
集』에 의하면, 수도산은 신라 말에 신방神昉(?~?) 화상이 은거하며 수도한
곳이라 하여 산의 이름이 수도산으로 되었다고 한다. 인적이 드문 이곳은
그 옛날부터도 난세에 속세의 혼란을 피하여 은거하기에 좋은 곳으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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