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5 - 고경 - 2023년 4월호 Vol.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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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의 연구사적 성취였
다고 할 수 있다. 1959년
에는 전북대 총장에 취임
했고, 한국철학회 초대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종
신회원 등을 역임했다.
고형곤은 50대 후반
에 삶의 노선을 완전히 사진 2. 1966년 민정당 의원 시절 국회에서 질의하는 고형곤.
사진: 중앙일보.
바꾸어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63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6대 국
회의원으로 4년간 일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에 대해 그는 “미국 예일대학
에 1년간 유학한 뒤 여의도 비행장에 내리면서 한국과 한국인의 삶이 미국
과 비교해 너무 가난하고 초라한 데 놀라 이제는 철학이고 뭐고 걷어치우
고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을 위해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
히 솟구쳤다.”고 술회했다. 5·16 군정 세력에 반대하는 민정당의 사무총
장을 지냈고, 민정당을 이은 민중당과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그는
한동안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국회의원 시절에 청송장학금을 조성했고, 고려대장경 번역의 의의와 가
치를 인정하여 동국역경원의 사업 예산을 늘리는 데 일조했다. 1975년에는
70세의 나이로 내장산에 들어가서 10여 년간 칩거하며 원효 및 현대철학에
관한 저술 집필에 전념했다. 하지만 서울로 상경하는 도중에 아쉽게도 원고
를 분실했고, 이후 연구를 지속하며 그 내용을 복구하려 했지만 고령으로 결
국 이루지 못했다. 만년에는 『금강삼매경』에 대한 독창적이고 알기 쉬운 해
석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2004년 6월 25일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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