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고경 - 2023년 6월호 Vol. 122
P. 27
면의 용기를 자랑하고, 혹은 마음의 섬세함을 자부한다. 그렇지만 이 거울
은 그 고귀한 내면이라는 것 역시 자아를 증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집착일
뿐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아를 형성하는 안팎의 비실체성을 남
김없이 드러내는 이 거울의 냉정한 비춤 앞에서 자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마치 진시황의 용서 없는 칼날이 대담한 역적 후보, 세심한 간신 후
보를 용서 없이 쳐냈던 것처럼!
다만 진시황의 거울은 분서갱유의 역사적 참극을 일으켰지만 이 지혜의
거울은 마음속의 난신적자들을 귀순시켜 천하태평의 시대를 복원한다. 자
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자리에서 지금의 이 인연을 정성껏 대접하는 천
진한 살림이 시작된다.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신다. 배가 고프
면 땅을 갈아 배를 불린다. 하늘·땅과 한 몸이 되고 춘하추동과 하나가 된
다. 그리하여 우주와 한 몸으로 출렁이는 통일의 춤을 춘다. 불교적 입장
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있을 수 없다. 진리와 내가 둘이 아니고, 부처·
조사와 한 마음이 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거울 같은 지혜를 대원경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갖
추고 있는 것이지만 두꺼운 의식의 먼지에 뒤덮여 있다. 이 의식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수행이다. 육조스님은 아예 그 ‘먼지가 일어난 일조차 없음
[何處惹塵埃]’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수행을 한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철저
한 무심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떻든 이렇게 의식의 먼지가
사라져 티끌조차 남지 않았을 때 부처의 거울 같은 지혜, 즉 대원경지가 드
러난다.
보통 부처에게는 네 가지의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묘관찰지妙觀察智, 평
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가 그것이다. 이 중 특
히 대원경지가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도래, 여래의 완전한 복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