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고경 - 2023년 8월호 Vol.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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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초월적이다.
           성철스님은 이 분파분증론을 비판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견사혹)은 물론
          공에 대한 집착(진사혹)에서 벗어난 10주 초주가 굉장한 차원임에는 틀림없

          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아도 앞으로 통과해야 할 지위가 무려 41개나 된다.

          아무리 본격적인 차원이라 해도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러니 돈오, 견성, 무생법인의 성취가 곧 구경각임을 주장하는 성철스님의
          입장에서 이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간지점에 견성이 일어난다

          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끊어야 할 무명이 남아 있는 차원을 견성이라고 인정한다면 이치
          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천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견성은 참선수
          행의 궁극적 도달점이다. 만약 이것이 초주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떤 중간지점에서 견성을 인정받는다면 많은 수행자가 거기에 머물러버

          릴 수 있다. 10주 초 견성론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화엄의 지위론




           한편 화엄의 주장은 천태에 비해 훨씬 더 초월적이고 낭만적이다. 이에
          의하면 10주 초에 견성하여 부처가 된 뒤 지위를 밟아가며 동체대지(10주),
          동체대행(10행), 회향대원(10회향)를 성취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나아

          가 10지에 진입한 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따르는 길을 걸어(초지~7지) 무생

          법인을 증득하는(8지) 성취에 이른다.
           10주 초, 초발심에 앞당겨 깨닫고 나중에 닦아 나간다는 분수분득分修分
          得의 논리이다. 번뇌의 타파에 방점을 찍는 천태와 달리 법신의 성취에 방

          점을 찍는 것이 화엄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천태와 비교하면 견성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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