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고경 - 2023년 11월호 Vol.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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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해야 한다. ‘이해수행의 길’과 ‘마음수행의 길’을 뒤섞어 버리면 선종의
생명력이 훼손된다.>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선문禪門의 마음수행은 불교 교학뿐 아니라 선종 내부에서도 제대
로 간수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수행을 선문禪門의
마음수행과 섞어 버리면, 마음수행의 길이 혼탁하고 어지러워져
더욱 제 길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
이를 분명히 해야 마음수행의 길이 드러난다. 그런데 지눌이 역설
하는 돈오점수는 화엄의 ‘이해수행에 의한 깨달음[解悟]’을 선문의
돈오에 연결시키려는 시도이다. ‘이해수행에 의한 돈오점수’가 선
문 안에 득세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선종이 소중히 복원하
여 간수해 온 ‘마음수행의 길’이 다시 막힌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을 결합시키려는 해오점수解悟漸修는 선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있다. 차이를 분명히 가려내어 마음수행의 길을 보존해야
하겠다.
필자가 헤아려 보는 성철의 의중이다.
지눌과 성철이 함께 열어주는 길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를 기준으로 보면,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을 뒤섞으면 마음수행에 대한 왜곡이 지속되어 마음수행의 길이 혼란해지
고, 그것은 마음수행의 본령을 애써 복원하여 간수해 온 선종의 생명력 훼손
을 의미한다.>는 의미에서, 성철의 비판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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