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고경 - 2023년 11월호 Vol.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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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의 시도는, <선종 구성원으
             로서 이해수행의 의미와 가

             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선문禪
             門 안에 품으려 했다.>는 점

             에서  각별하고  유의미有意
             味하다.
               지눌의 문제 의식과 대안

             은 타당한 맥락이 있다. 또

             한 성철의 지눌 비판과 대안
             도 타당한 맥락이 있다. 문
             제 의식 등 ‘각자의 관점과

             견해를  발생시킨  조건들의

             인과 계열[門]’을 구분하여
                                         사진 3.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며 해인총림의 수행가풍을
             성찰하면, 두 경우 모두 간                  진작하고 간화선풍을 드날린 성철 종정 예하.
             과해서는 안 될 ‘나름의 타당성[一理]’을 지닌다. 이 ‘나름의 타당성’들은 모

             두 현대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적실한 해법이기에 더욱 소

             중하다. 외견상 대립하고 충돌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지눌과 성
             철은 합세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지눌이 가리키는 길은, ‘이해와 마음의 관계’가 선 수행의 길에서 활발하

             게 상호작용하는 전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해의 의미 규정력’이 없

             다면 마음이 비게 되고, 마음의 ‘이해 구성력’이 없다면 이해의 물이 썩는
             다. 지눌의 시도는,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보태는 길을 전망하게 해 준다.

               이에 비해 성철이 가리키는 길은, ‘마음이 차지하는 근원적 상위上位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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