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고경 - 2023년 12월호 Vol.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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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가르침을 듣지도 못하고 8개월간 방아만 찧게 되
었으니 육조스님의 간절함은 거의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혜명상좌는 어땠을까? 그는 속세에서 장군이었다. 그리하여 출가 이후에
도 임전무퇴,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참선에 임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
절함이 커지고 깊어갔음은 자명한 일이다. 만약 누군가 이렇게 알고자 하
는 간절함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가장 충실한 참선
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바람으로 채워진 풍선과 같다. 한숨만 더 불어넣어
도 풍선이 터질 찰나가 되면 그것을 터뜨리는 시절 인연이 찾아온다. 그것
은 육조스님이나 혜명상좌가 그랬던 것처럼 스승의 한마디 말일 수 있다.
그렇지만 만발한 복숭아꽃일 수도 있고, 대나무에 기왓장 부딪치는 소리
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다. 경허스님에게는 그것이 “콧구
멍 없는 소”에 대한 질문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간절함의 총량이
다. 그 총량이 충분하면 풍선은 어떻게든 터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까맣게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찰나
와 순간을 채우는 것이 참선이다. 이 간절함은 생사를 피할 수 없다는 인
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없
을까를 묻는 문제의식에서 일어난다. 왕궁의 성벽을 넘어 황야로 나아간
부처님이 그랬고, 달마스님 앞에서 한 팔을 잘라 바친 혜가스님이 그랬다.
“유한하고 상대적인 삶을 넘어 영원하고 절대적인 삶을 살 수는 없을까?”
를 물었던 성철스님이 그랬다. 이것이 진짜 참선이다. 그러니까 참선은 알
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이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
한가의 문제다.
우리는 생사의 특급 태풍 속에 펄럭이고 있다는 점에서 부처님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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