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고경 - 2024년 1월호 Vol.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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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자체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
           학위를 받은 이후 미국을 오가면서도 항상 『금강삼매경론』을 지니고 다
          녔다. 틈틈이 생각하고 꾸준히 생각했다. 이리하여 이십 여년의 세월이 흘

          렀다. 이제야 약간은 이해가 되는 듯하다. 『선문정로』에서 말하고 있는 여

          래선과 조사선의 차이 또는 돈오와 점수 등에 대해 큰스님께 여쭈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큰스님은 계시지 않는다. 애닯고 애달프다.



            하남 정심사 창건 인연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첫해는 정릉에 있는 삼정사에서 생활했다.
          사형인 주지 삼밀스님이 특별히 배려해 주어서 새벽예불만 참석하고는 종

          일 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초파일 연등을 만드는 시기에도 매일 학교

          에 갔다.
           학교에는 채식 식당이 없어서 당근이나 오이를 싸 가지고 다녔다. 이전
          에도 삼정사에는 사형 스님들이 공부하러 와서 기거를 했다. 주지스님의

          마음 씀이 넉넉해서 일반 학생들도 자주 와서 기거했다.

           삼정사에 오는 신도님 중, 아주 오래전부터 큰스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신행생활을 해 온 백련화 보살님이 말했다. “큰스님 계실 때 큰스님의 처
          소를 서울에 만들어 두세요. 그래야 훗날 안 계실 때 스님들이 머물고 공

          부도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보살님이 소개하는 곳을 원택스님과 함께

          가서 보았다. 지금의 정심사 자리이다. 이곳은 그린벨트 지역이라서 건축
          과 생활에 관련해서 제약이 많다고 했다. 위치가 괜찮아서 그 자리를 정하
          게 되었다.

           한편 서울에서 백련암으로 기도 다니던 보살님들이 중심이 되고 여러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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