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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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부유하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조정의 사원 노비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사원에
서는 여자 종이 일을 하였고, 승려와 간통하는 일이 적발되었다. 세종대에
양주 회암사와 북한산 진관사의 승려들이 사원 여자 종과 간통한 사건이
일어나자, 의정부, 육조, 대간에서 각각 상서를 올려 사원 노비의 혁파를
건의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서하였다. “… 이제 회암사 승려 가휴可休와 정후正
厚, 진관사 승려 사익斯益과 성주省珠 등 수십여 인은 항상 절의 여
자 종과 음욕을 방자히 행하여 삼보를 더럽혔고 국법을 어겼습니
다. … 신 등은 원컨대, 모든 절의 노비를 다 없앤다면, 승려들로
하여금 음욕의 죄에 빠지는 잘못이 없게 하고 청정히 수행하고 욕
심을 적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다행이 없
을까 합니다.” - 『세종실록』 1년, 1419년 11월 28일.
세종은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였지만, 모든 사원 노비를 혁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원 노비는 그 이후 여러 기록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이때 대대적으로 사원 노비가 속공되어 사찰 경제에 큰 타격
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근대 이후 학계에서는 이를 ‘숭유억불 정책’이라
부르고 있지만, 엄밀이 말하자면 ‘불교 정화 정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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