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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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과 깨달음의 약도에 따르자면 돌 원숭이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다. 출발과 동시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처음 발심하는 그
때 무상정등각을 성취한다[初發心時便正覺]’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칙적으로 『서유기』의 얘기는 여기에서 끝나야 한다. 그런데 초발심에 정
각을 성취한다고 하지만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로 깨달음의 여정을
걸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당장 초발심의 깨달음을 말하는 화엄에
서도 그 뒤의 길고 긴 여정(10주, 10행, 10회향, 10지)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원숭이 왕의 여행
축복의 땅 수렴동을 발견한 돌 원숭이가 당장 그랬다. 그는 원숭이들의
왕으로 추대되어 동굴 속에 머문다. 세월의 기운을 벗어난 동굴의 속이 안
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 원숭이는 왕위에 오르면서 그 이
름에서 돌 석石 자를 빼고 아름다울 미美 자를 붙여 아름다운 원숭이 왕[美
猴王]으로 불리게 된다.
이로 인해 작지만 본질적인 균열이 일어난다. 동굴의 안과 밖을 나누어
안전한 동굴의 안을 집착하고(법집),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누어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규정하는(아집)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선과 악도 생
겨났다. 낙원을 상실하는 실락원의 사건이 손오공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원숭이 왕은 죽지 않는 길, 낙원 복귀의 길을 찾는다. 왕의 참모
들이 말한다. “대왕께서 죽음을 해결하고자 하시니 참으로 도를 구하는 마
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에 돌 원숭이는 아름다운 원숭이 왕의 지위를 내
려놓고 안전한 동굴의 안에서 나와 죽지 않는 길을 찾는 여정에 들어간다.
그것은 이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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