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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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색으로 보인다. 어릴 적 즐거움에 대한 붓다의 회고를, 고타마 싯다르타
가 아닌 붓다를 기준으로 삼아 각본화시키고 싶은 후인들의 태도가 반영
된 것이다. 후인들에 의한 윤색이나 각색 이전의 붓다 육성은 아마 이런 정
도가 아니었나 싶다. “어릴 적 나무 밑에서 경험했던 즐거움은 감관 쾌락
을 추구한 결과도 아니고 해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즐거움이라면 거부
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행의 길을 걸을 때, 모든 즐거움은 ‘무조건’ 거부해야 할 감관적 쾌락
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릴 적 나무 밑에서 경험했던 즐거움은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얻어진 즐거움이라 할 수 없었다. 어린애가 무슨 감
관적 쾌락을 추구했겠는가. 또 심신의 평안과 수준을 훼손하는 해로운 즐
거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런 즐거움마저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거나
거부해야 할까?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는 위대한 반전의 순간이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고타마 싯다르타
가 붓다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분기점이라 생각한다. 실패의 길에서 성공
의 길로 접어드는 반전이었다. 이 사고의 반전이 깨달음을 예비한다. 연이
어 성취하는 사선四禪, 삼명三明은 이 생각의 반전이 실마리가 되어 발생한
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이 생각의 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건적 발생에 대한 개안, 이지적 연기 깨달음
선정의 두 대가가 인정하는 성취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던 고타
마 싯다르타. 그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한다. 고행이다. 감관을 토대로 무
한히 증폭하는 쾌락의 불안과 오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관욕구를 가학적
으로 거부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렇게 하면 깨닫는다고 하니 망설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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