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고경 - 2024년 5월호 Vol.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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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가 다르면 길이 다르기에, 길을 고를 때는 무엇보다 우선 목적지
를 제대로 선택해야 한다. 목적지를 잘못 알면 엉뚱한 길에 올라 헛수고한
다. 목적지를 착각하고 길을 걸으면,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목적지에 이르
지 못하거나 엉뚱한 곳에 이른다. 그럴 때는 허무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의 특징과 풍경을 미리 세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
나 가고자 하는 데가 다른 목적지와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곳에 가면 어
떤 특징적 풍경이 기다리는지 정도의 기본 이해는 있어야 한다. 길 떠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안내서가 소상하고 정확할수록 목적지에 도착할 가능
성이 높다. 붓다는 자신이 직접 확인한 목적지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최고
의 길 안내자이다. 그런 분이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대해 <가보면 압니다.
묻지 마시고 그냥 열심히 걸어가세요. 내가 먼저 가보니 엄청난 곳입디다.
나 못 믿어요?>라고 했을까? 아니면, <열반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면 무지
한 중생은 부질없는 상상과 오해만 키웁니다. 그러니 최소한으로 간단히
말해 둡시다>라고 했을까? 둘 다 아니다. 열반에 대한 붓다의 설법을 이렇
게 이해한다면, 붓다와의 대화에 문제가 있다. 열반 자체에 대한 붓다의 언
급들, 그리고 열반으로 이끄는 붓다의 설법을 ‘조건 인과적’(연기적)으로 음
미하지 못한 결과이다. 결국에는 연기법의 의미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가
문제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짚어보겠다.
같은 명칭의 서로 다른 두 목적지
흥미로운 것은, 불교 내부에서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대해 전혀 다른 시
선이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열반·깨달음은 불변·절대의 궁극실재
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하다>라는 관점이 그 하나이고, <붓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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