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1 - 고경 - 2024년 7월호 Vol.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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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을 다시 일으켰다. 그런
데 도헌과 긍양의 선법 사이
에는 분명한 단절이 존재한
다. 그것은 신라와 고려가 단
절되어 있음과도 같다. 긍양
은 봉암사를 찾아온 수많은
수행자들에게 도헌과는 달리
석상의 선풍으로 남종의 돈오
선법을 지도했을 것이다. 긍 사진 5.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보물 171호). 사진:국가문화
유산포털.
양의 열반 이후 그의 문도들은
긍양과는 달리 석상의 선풍을 올곧게 지켜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956년(광종 7) 긍양이 열반에 들고, 965년(광종 16)에 이몽유의 비문이 완
성된다. 그리고 971년(광종 22)에 광종은 “국내의 사원 가운데 오직 세 곳만
은 전통을 지켜 문하의 제자들을 상속相續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 이른바 세 곳이란 고달원高
達院·희양원曦陽院·도봉원道峰院이다.” 라는 조치를 내렸는데, 이러한 광
4)
종의 조치로 희양산문은 더욱 번성하게 된다.
긍양의 문하에 형초逈超가 있었고, 형초의 문하에 원공지종圓空智宗이 있
었다. 지종은 오월에 들어가 영명연수靈明延壽로부터 인가받고 돌아와 법
안종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광종의 절대적 지원에 의하여 크게 번성했던
희양산문은 이러한 법안종 세력에게 흡수되었고, 성종 이후 급격히 쇠퇴
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4) 김정언,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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