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9 - 고경 - 2024년 7월호 Vol. 135
P. 89

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금 국가에서 오히려 기신忌辰 수륙재를 개설하니 신하와 서인들

                  의 설재設齋를 금지할 수 없으며, 종문의 승선僧選의 법은 아직도 그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승도僧徒로 출가出家하는 것을 중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 『세종실록』 14년, 1432년 3월 5일.



               위의 상소는 세종 14년 2월 한강에서 있었던 수륙재를 비판하며 폐지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여제가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와 그 의미가 비슷하
             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미 태종 4년(1404) 6월 『홍무예제』에 의거하여 전국
             각지에 여단厲壇을 건립하고 ‘여제의厲祭儀’가 상정된 바 있었고, 세종 22년

             (1440)에는 예조에서 『여제의주厲祭儀註』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그리고 단

             종 1년(1453)에는 수륙재를 대신하여 매년 봄가을에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
             다. 하지만 곧바로 여제가 설행되지는 못하고 성종대에 처음 여제가 설행
             되었다. 성종 16년(1485) 황해도 극성에서 『국조오례의』에 의거하여 여제를

             올렸다. 이후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는 점차 여제에게 자리를 내어주었

             던 것 같다.
               또한 수륙재가 여제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칠칠재로서 수륙재 역시 점차
             유교적 의례로 변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태종비 원경왕후 사십구재

             부터 연산군대 인수대비까지 사십구재가 수륙재 형식으로 설행되었지만

             그 이후 왕실의 상례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행해졌다. 성종대에는 무주
             고혼을 위한 수륙재가 폐지되었고, 연산군대에는 칠칠재로서 수륙재가 사
             실상 폐지되었다. 이로써 궁궐 내 왕실의 불교 의례는 거의 사라지고, 지

             방의 원당 사찰로 이관되어 설행되었다.



                                                                          87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