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선림고경총서 - 02 - 산방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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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물건도 남겨 두지 않았으므로 상황을 만나 외물에 응할 때
그저 손 가는 대로 했을 뿐,애초부터 이리저리 궁리하여 선택
하지는 않았습니다.그 자리에서 번개처럼 해버려야지 자취를
더듬다가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이 되고 맙니다.더구나 어찌 사
량분별에 얽매여 선사들의 빼어난 기연[峻機]을 희롱하고 교묘
한 말을 꾸며서 후배들을 부채질하고,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주
장을 떠받들도록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선배들이 상대방을 근기에 알맞게 지도할 때에,그 내용
을 추세( 麤細),현밀(顯密),광략(廣略)등으로 다르게 합니다.이
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진실한 마음에서 그런 것이지 애
초부터 조작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입니다.비유하면 마치 커
다란 범종과 북이 사람이 두들기는 대로 소리나는 것과 같습니
다.크고 작고 맑고 탁한 그 소리는 본래 북이나 종이라는 하나
의 정해진 그릇에 달렸습니다.그런데 그릇의 성능이 좋지 못하
다고 하여 거기에다 눈꼽만큼이라도 다른 소리를 첨가시키면 그
고유의 음색을 잃고 마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즈음 선(禪)을 한다는 작자들은 그저 큰 선상에 앉아 주미
불자를 휘두르기 위해서 우선 여러 스님들이 말한 요점을 모으
고 간추려 기억하고,심지어는 여러 학파들의 잡설까지도 섭렵
하여 말밑천을 삼기도 합니다.이들이야말로 선을 입으로만 하
는 사람들입니다.이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의 속박을 풀어 주기
는커녕,끝내는 자신의 진면목을 잃고 나아가 자신의 도안(道眼)
마저도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이와 같이 잘못 수행하여 놓고도
자기들끼리 서로서로 추종하고 숭상하기도 합니다.그리하여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