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4 - 선림고경총서 - 04 - 치문숭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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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치문숭행록
어제는 오늘 가겠다 기약하였더니
문을 나서 지팡이에 기대어 다시 생각해 보네.
승려는 산골짜기에 거처함이 합당하며
나라 선비의 잔치에 감은 마땅치 않네.
이는 도광스님의 고상한 경지와 앞뒤를 가릴 수 없으니 같은
바퀴자국에서 나온 듯하다.아,이 두 게송은 납자라면 아침저녁
으로 한 번씩 읊조려야 옳으리라.
13.가사와 법호를 받지 않다[不受衣號]
당(唐)의 전부(全付:881~946)스님은 오군(吳郡)곤산(崑山)
사람으로,어느 날 남탑 용(南塔涌)스님을 뵙고 심지(心地)를 밝
힌 바 있다.그 뒤에 청화선원(淸化禪院)에 머무르자,전당(錢唐)
의 충헌왕(忠憲王)이 사신을 보내어 자가사(紫袈裟)를 하사하였
다.이에 전부스님은 소장(疏章)을 올리고 애써 사양하였으나,사
신이 거듭 내왕하자 또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겉치레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다만 후세 사람들이
나를 본받아 자기의 욕심을 펼까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도 왕이 순일선사(純一禪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스님은 다시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4.하사한 가사를 끝내 사양하다[力辭賜紫]
오대(五代)시대의 항초(恒超:877~949)스님은 범양(范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