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6 - 선림고경총서 - 07 - 임간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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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다섯 차례나 사양하고서야 주지를 그만두고 한가히 지낼 수 있
었지만 학인들은 더욱 스님을 따랐다.사직(師直)사경온(謝景溫)이
담주(潭州)태수로 있을 때 대위산(大潙山:湖南省 長沙府 소재)이
비어 스님을 모시려 하였으나 세 차례나 굳이 사양하고 끝내 부임
하지 않았다.그러자 또다시 강서(江西)의 기자(器資:강서의 轉運
判官)를 팽여려(彭汝礪)를 통하여 장사(長沙)로 부임하지 않는 이유
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도록 간청하니 스님은 이에 대하여 말하였다.
“사공(謝公)과 만나보는 일이야 내 바라지만 대위산을 맡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마조(馬祖)와 백장(百丈)스님 이전에는 주지라는
직책이 없었으며,도 닦는 이들은 서로가 한가하고 고요한 곳만을
찾았을 뿐입니다.그 이후에 주지의 직책이 있기는 하였으나 임금이
나 관리들도 그를 존경하고 예우하여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었는
데,오늘날에는 그렇지 못하고 관청에 이름을 걸어 놓은 꼴이 마치
백성의 호적처럼 되어 버렸습니다.그리하여 관청에서는 심지어 마
부를 보내어 쫓아다니고 불러들이니,이것이 어디 할 노릇이겠습니
까.”
팽기자가 그대로 전하자 사사직은 이를 계기로 서신을 보내어
한번 뵙기를 바라며 감히 주지해 달라는 것으로 스님의 뜻을 꺾지
는 않겠다는 뜻을 전하니 스님은 드디어 장사(長沙)지방으로 그를
찾아갔다.스님은 사방의 벼슬아치들과 뜻이 맞으면 천리 길이라도
찾아가지만 맞지 않으면 십리 길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황룡사에서 개법(開法)한 지 12년 만에 암자에 은거하며 20여 년
을 지냈다.천하 사람들은 스님을 가리켜 ‘도가 있는 곳’이라 불렀
으니 말세 큰스님[宗師]들의 모범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