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선림고경총서 - 23 - 인천보감
P. 122
122 인천보감
을 지워 없앨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이 스님이 늙어서까지 꼬장꼬장하구나!”하면서 편할
대로 하라고 허락하였다.
소흥 3년(1133)에 법사는 도사(道士)유약겸(劉若謙)과 함께 조
정에 들어가 기도도량의 서열을 정비하였는데 그때 올린 상소는
대략 다음과 같다.
“숭녕(崇寧:1102~1106)년간에 임영소(林靈素) 등이 높은
벼슬을 멋대로 차지하여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는데,이
로 말미암아 도교가 불교의 서열을 누르게 되었습니다.그러
나 건염(建炎:1127~1130)년간 후로 도사들의 모든 재산은
다시 몰수되고 관의 비호도 없어졌으니 마땅히 조종의 옛 제
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바라옵건대 조정에서 현명한 지휘
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특히 개정령을 내려 천하에 반포하
고 시행케 하여 풍속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국정에 일이 많아 이 주장은 유보되었으나 소흥 13년
(1143)에 와서 다시 정돈하는 모임을 열어 승려들은 왼쪽에,도사
들은 오른쪽에 자리할 것을 영원한 규정으로 삼았다.
그 후 가뭄 귀신으로 백성들이 시달리자 황제의 명을 받아 궁
으로 들어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법사는 자리에 올라가자 금으
로 된 물병 네 개를 빌려서 병마다 산 붕어를 넣고 물을 뿜어 주며
가만히 축원하였다.그리고는 곧 발빠른 사람 넷을 시켜 물고기를
강과 소(沼)에 놓아주게 하였는데,그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비가
쫙 퍼부으니 황제의 얼굴이 매우 기쁜 기색이었다. 탑명(塔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