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6 - 선림고경총서 - 23 - 인천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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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물건은 없었다.
기도를 하면 언제나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메뚜기를 없애 달
라고 빌면 메뚜기가 경계 밖으로 떠나고,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
면 장마비가 내렸다.술고방공(術古龐公)이 율사에게 비를 빌도록
명하였는데,축원[懺]이 입에서 끝나기도 전에 천둥이 치며 소나
기가 쏟아지니 공이 말하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법을 섬기지 않았는데 지금 율사를 만
나고 보니 귀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태사(太師)사월왕(史越王)이 율사의 비 뒷면에 이렇게 썼다.
“유학을 하는 사람은 유학으로 자기를 묶고,계율을 하는 사람
은 계율로 자기를 묶는 것이 공부하는 이들의 큰 병통이다.그런
데 유독 율사만은 3천 가지 몸가짐과 8만 가지 세세한 행을 갖추
어 흠잡을 데 없는데도 늘 정혜(定慧)의 테두리를 껍질 벗듯 초탈
하였으니 율장 중에 진짜 법왕의 아들이었다.그러므로 수백 년
뒤까지도 사람들을 분발케 하니,그를 남산율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하나 그 공은 배가 된다고 하겠다.
만일 지난날 율사로 하여금 승복을 입게 하지 않았더라면 반드
시 유교의 우두머리로서 특출난 조예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터인
데,아까운 일이다.
율사가 돌아가신 지 26년이 되도록 그 남긴 향기가 없어지지
않자 조정에서는 ‘대지율사(大智律師)’라는 호를 내리고 탑을 ‘계
광(戒光)’이라 이름지어 시호를 하사하는 은혜를 주었다.이 일은
유공(劉公)의 글에 언급되지 않았기에 비의 뒷면에 써 둔다.” 탑명
(塔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