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0 - 선림고경총서 - 23 - 인천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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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았다.너와 나를 서로 잊고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다 쏟아놓으
            며 하루도 법락을 맛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 후 승상 장위공(張魏公:張商英)의 청으로 경산(徑山)에 주
            지하니 천하의 납자들이 모여들어 따르는 대중이 2천 명이나 되
            었다.선사는 청규(淸規)로 대중들을 묶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자율

            에 맡기기도 하였다.납자들이 불법의 요의를 서로 따지다가 혹
            기분이나 이론이 맞지 않아 선사 앞에서 다투는 일이 있으면 그
            때마다 선사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정을 지어 주지 않고 으

            레 담당자를 보내서 쫓아내 버렸다.당시 유나(維那)로 있던 소진
            (紹眞)스님은 촉(蜀)땅의 선비였는데 선사가 명을 내리면 잠만 자
            면서 그대로 시행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산 유람을 하도록

            하였다.이 일이 나중에 선사에게 알려지니 선사는 “이 묘희(妙喜
            :대혜의 호)의 용상굴(龍象屈)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열중(悅

            衆:대중을 통솔하는 직무)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칭찬하였다.
               형중온(曉瑩仲溫:임제종 대혜파)이 말하였다.
               “선사는 뜻이 크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취향과 식견이 고명하

            였다.성격은 비록 급했으나 도량은 실로 너그러워 성이 나서 꾸
            짖는 가운데도 사실은 자비로움이 있었다.대중 가운데 계율을 지

            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명령대로 거행케 하지만 한번도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으니 선사가
            소진 유나를 칭찬한 이유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뒷사람들이

            거울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속전(正續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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