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선림고경총서 - 23 - 인천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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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까지 올라와 있었다.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仁宗)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淨
因寺)에 주지하도록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련(懷
璉:1009~1090,운문종)선사를 추천하였다.인종이 회련스님을 보
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大覺禪師)라는 법호를 내리셨다.영
종(英宗)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련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소동파(蘇東坡)가 신규각(宸奎閣)의 비문을 짓게 되
어 회련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보았
다.
“신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으나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
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참요(參寥:?~
1106,운문종)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실 때 왕
[英宗]께서 전국 어느 절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
의 조서를 직접 내리셨는데,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있다면
전문(全文)을 써 보내주십시오.비문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
다.”
회련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그러나 스님께
서 입적하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소동파가 이 소식
을 듣고는,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직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소동파의 신규각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