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선림고경총서 - 23 - 인천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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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으로 경론에 대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서호(西湖)가에 높
            이 누웠으니,권세로도 부귀로도 스님을 꺾을 수 없었으므로 속된

            무리들은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이때 문목왕공(文穆王公)이 전당(錢塘)에 오게 되었는데,군(郡)
            의 스님네들이 모두 관문까지 마중을 나가자고 하자,스님은 몸이

            아프다면서 가지 않고는 심부름꾼을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자운법사(慈雲法師)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전당 땅에 중이 하
            나 있다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스님은 늘 비장(脾臟)에 병이 있어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가
            운데서도 침상에 붓과 벼루를 깔아 놓고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았

            다.하루는 대중에게 고하였다.
               “내 나이 마흔아홉인데 이미 오래 못 살 것을 안다.내가 죽거

            든 땅을 골라 후하게 장례 치르느라 내 허물을 더 불리지 말고 너
            희들이 항아리를 합쳐서 장사 지내 다오.”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 제문(祭文)을 지어 부탁하였다.



                  삼가 강산과 달과 구름을 차려 놓고 중용자(中庸子:지원법
                사의 호)의 영을 제사 지내노라.그대는 본래 법계의 원상(元

                常)이며 보배롭고 완전한 묘성(妙性)으로서,아직까지 동정의
                조짐이 없었으니 어찌 오고 감에 자취가 있겠는가.이제 일곱
                구멍[七竅:사람 얼굴에 나 있는 구멍]을 뚫으니 혼돈(混沌)이
                죽고 6근이 나뉘어 정명(精明:一心)이 흩어지게 되었도다.그
                리하여 그대 스스로의 마음을 보건대 바깥 경계와 다른 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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