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선림고경총서 - 23 - 인천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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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는 어디에서 나를 보는가?”
               선사가 대답하기를,“오늘은 스님께 걷어 채였습니다”하였다.

            국사가 다시 “이게 무엇이냐?”하자 선사가 향대(香臺)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나가 버리니 국사가 쓸 만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사가 하루는  화엄경 을 읽다가 “몸도 몸이라 할 것이 없고

            수행도 수행이라 할 것이 없으며 법도 법이라 할 것이 없다.과거
            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공적(空寂)
            할 뿐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활짝 깨쳤다.선정에 들어 십여 일

            이 지난 뒤 비로소 정에서 깨어나니 심신이 상쾌하면서 문득 현
            묘하고 비밀스런 것이 생겨났다.선사는 이통현(李通玄)이 화엄경
            에 대해 해석한 논(論)이 규모가 넓고 뜻이 깊다고 생각하여 이것

            을 합쳐 120권으로 만들었는데[華嚴經合論],그것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

               충의왕(忠懿王:吳越王)이 선사의 도풍을 흠모하여 월주(越州)
            청태사(淸泰寺)에 주지케 하였는데 선사는 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방장실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든 듯하였다.하루는 선정

            에 들어 두 스님이 법당 난간에 기대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
            다.그런데 천신(天神)이 둘러싸고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조금 뒤에

            갑자기 악귀가 나타나 침 뱉고 욕을 하며 천신의 자취를 쓸어버
            리는 것이었다.나중에 난간에 기대섰던 스님들에게 까닭을 물어
            보니 처음에는 불법을 이야기하다가 뒤에는 세간 이야기를 했다

            고 하였다.이에 선사는 말하기를 “한가한 이야기도 이러한데 하
            물며 불법을 주관하는 사람이 북을 울리고 법당에 올라가서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랴”하고는 이때부터 종신토록 한번도 세상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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