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선림고경총서 - 26 - 총림성사
P. 52

52


                 趙州更有爐頭句


               수인스님은 그 후 매산(梅山)땅으로 돌아가 16년 간 암자에서
            살았다.그 후 천동사(天童寺)정각(宏智正覺:1091~1157)스님이

            대주(隊州)에서 상우(上虞)에 이르러 그의 암자에서 하룻밤을 머무
            르게 되었는데,침상을 맞대고 함께 이야기해 보고는 그를 매우
            비범하게 생각하였다.정각스님이 천동사로 돌아와 하안거가 끝나

            가도록 수좌(首座)를 맞이하지 않자 일 맡은 이들이 어떻게 할 생
            각이냐고 아뢰었다.정각스님은 우리 수좌가 조만간 이곳으로 올

            것이라 하고 시자를 월주(越洲)로 보내 수인스님을 맞이하였다.수
            인스님이 천동사에 도착하자마자 수좌실로 초빙하니,대중들은 이
            를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얼마 후 수인스님에게 불자를 잡고

            패(牌)를 걸게 하니,대중들은 그에게 굴복하였다.
               그 후 2년 만에 굉지스님이 입적하자 묘희스님이 장례를 주관

            하였는데 동서 반열(班列)의 모든 승려가 포복(布服:승려의 喪服)
            을 입었으나 수인스님만은 이를 입지 않았다.묘희스님이 이상하
            게 여겨 그 까닭을 묻자 수인스님은 은밀히 그 사유를 말하였다.

            이에 묘희스님은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설당 회하에서 온 사람이
            었군!”하였다.
               그는 후일 장로사 (長蘆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법석이 크게 융

            성하였다.
               오대산 노파 화두에 대하여 지은 송이 있는데 학인들은 앞다투
            어 이를 읊었다.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