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선림고경총서 - 27 - 운와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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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와기담 上 55


            강론을 허락하지 않는 때가 없었으며 길을 걸을 때는 선후를 따
            지지 않았고 앉을 적엔 주객의 자리를 묻지 않았다.이는 그들이

            도로써 서로를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까닭에 그의 시에는


                 선심(禪心)을 은밀히 전해 주시려거든
                 이곳에 얼마쯤 더 머무르소서.
                 禪心如密付 更爲少淹留



            라는 구절이 있다.그는 스님과 이야기 나누던 중 이런 말을 하였
            다.

               “제가 젊은 시절 소황문(蘇黃門:소동파와 황정견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글 짓는 법을 물어보았더니,황산곡이 나에게 ‘능엄
            경 과 원각경 을 익히 읽으면 자연히 문장력을 알고 이치를 통

            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동파가형(東坡家兄)은 황주(黃州)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을 닫고 깊이 파묻혀 지내면서 문장에만 매

            달리니 그의 문장은 확 달라져 마치 강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하
            였습니다.그 후 불교 서적을 읽어 실상을 깊이 깨닫고서 공자 노
            자의 학문을 공부하니 박학과 달변으로 막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의 역량은 헤아려 볼 수 없으리만큼 드넓은 경지에 이르렀습니
            다.이 때문에 그의 묘지명에 기재하였습니다.”
               융흥(隆興)개원(1163)5월,동래(東萊)여백공(呂伯恭)이 경산에

            올라가 대혜스님을 뵙고 두 달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대혜선사
            가 한자창의 이러한 말은 소황의 문하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였고,여백공 또한 이제껏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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