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선림고경총서 - 27 - 운와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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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와기담 上 93


               覯)는 지난날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첫째로 소시(召試)에 합격하
               였습니다.그러나 담당자가 실수로 빠뜨리는 바람에 그는 고향
               에 물러가 은거하면서 부모 봉양에 힘을 다하고 다시는 벼슬을
               하려 들지 않으니 그 고을의 준수한 수재들이 그를 스승으로 섬

               겼습니다.그는 육경(六經)강론에 능하고 해박한 지식과 민첩한
               언변으로 막힘 없이 성인의 뜻을 간파하며 저서와 문장에는 맹
               자와 양웅(楊雄)의 기풍이 스며 있어 실로 천하의 선비임에 부
               끄러울 바 없습니다.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여태껏 그를 거두어
               들이지 않아 뜻 있는 자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으니 이는 훌륭한

               인재를 버리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臣)은 오늘 그가 지은          예론(禮論)  7편, 명당정제도서(明
               堂定制圖序)  1편, 평토서(平土書)  3편, 역론(易論)  13편 등
               모두 24편을 10권으로 편집하고 이를 인쇄하여 올립니다.엎드

               려 바라옵건대 자비로우신 황제께서 정사를 마친 이경(二更)여
               가에 이 책을 한번 보신다면 그 사람의 재주와 학문이 평범한
               유학자의 그것이 아님을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상소를 계기로 조정에 나아가 벼슬 하나를 임명받고 뒤이어

            태학(太學)설서(說書:임금에게 經書를 강하던 宋代 벼슬)에 임명되
            었으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이에 앞서 태백은 잠서(潛
            書)를 저술하여 세상에 널리 유포했는데 그 내용은 불교를 극력

            배척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설숭 명교(契崇明敎)스님이 자신이 저
            술한 보교론(輔敎論)을 가지고 그를 찾아가 논변을 벌이니 그는
            처음으로 불교 서적을 유의하여 읽은 후에 이렇게 탄식하였다.

               “우리들의 교설은 반야심경   한 권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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